21세기
예술은 소통적이며 참여적인 변신을 필요로 한다
정중헌
(조선일보 논설위원)
새천년을
연 2000년의 한국문화는 세기의 전환에 때맞춰 예술창작에 ‘뭔가 새로운Something
New’ 바람을 모색하고 시도하고자 노력한 해로 기록될만 하다. 한해가
저무는 시점에서 과연 뭐가 새로운 것이며 그 성과가 무엇이라고 단정짓기는
어렵지만 ‘새로운 예술'이란 화두(話頭)는 국내외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새로운
예술의 해' 선포
21세기는
문화전쟁의 시대로 불린다. 정보화와 함께 문화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는
것이다. 이같은 정보와 문화의 시대에서 경쟁력의 무기는 창의력이고,
그것의 토대는 예술과 인문학의 육성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 세계적인
조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일본 등 선진국들은 국가 전략의
우선순위를 창의력 제고로 잡고 다양한 정책과 프로젝트를 추진중이다.
이같은 추세에 맞춰 한국이 예술의 새로운 기류를 조성하려는 의지는
문화창조와 예술창작에 활력이 될 뿐아니라 국가 정책으로 추진중인
문화산업 육성에도 원동력이 되리라는 점에서 특기할만 하다.
밀레니엄 축제로 막을 연 2000년 한국문화는 정부 예산 중 문화예산
1% 확보라는 바탕위에서 비교적 안정된 정책과 의욕적인 분위기로 출범했다.
문화비전 2000위원회가 정한 ‘새로운 예술의 해' 가 선포됐고, 98년부터
시작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이 3차로 확대되면서 교류의 폭이 넓어지고
활성화되는 고무적인 현상도 나타났다. 남북정상의 만남으로 화해분위기가
조성되면서 북한 예술단의 남한공연이 성사됐으며, 문화예술계에서도
남북 문화교류가 공론의 장에서 논의되는 등 변화의 물꼬가 트였다고
할 수 있다. 아셈ASEM 서울개최에 맞춰 음악회, 전시회 등 굵직한 문화행사들이
열렸고, 부산국제영화제가 아시아 영화마켓으로 부상하는 등 축제와
이벤트도 다양한 편이었다. 영화쪽에서는 한국판 블럭버스터가 연달아
히트함으로써 어느 장르보다 활기가 넘쳤으며 발전속도가 빨랐다. 이밖에
국어 로마자표기법 개정에 따른 여파와 외규장각도서반환을 둘러싼 논란
등도 올해 결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아젠다들이다.
하지만 문화향수자나 국민들이 바라본 2000년 한국의 문화예술은 결코
장미빛이 아니었다. 늘상 정치와 경제 논리에 밀리던 문화가 가까스로
홀로서기를 할 수 있을까를 기대했으나 역시나가 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하반기 한국사회를 짓누른 정쟁과 경제위기는 문화계에 짙은 그림자를
드리워 놓았다. 생계가 불안하고 세상이 시끄럽다 보니 문화예술은 뒷전으로
밀리게 되고 동숭동 극장가나 인사동 청담동 일대의 화랑가는 관객의
발길이 뜸해 불화의 늪에서 헤어나기 힘들었다. 결국 일반 대중들은
TV가 쏟아내는 말초적인 오락에 기댈 수 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화학습이나 문화체험은 그림의 떡일 뿐이며 삶의 질 향상은 21세기에도
요원한 것이 아니냐는 우려도 없지 않다. 또한 정치와 경제가 국민의
발목을 쥐고 가슴을 움츠러들게 한 2000년의 한국기상도가 모처럼 봉오리를
피워보려한 문화예술계의 여망을 일그려뜨렸다는 지적이 적지 않다.
우리의 2000년은 ‘새천년 국민축제'로 막을 열었다. 새천년준비위원회가
지난 천년을 정리하고 새천년에 대한 희망을 여러 상징으로 보여주려한
이벤트였다. 외국에서도 대형 축제와 기념행사들을 화려하게 펼친만큼
우리도 조촐한 천년맞이 행사를 갖는게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엄청난
제작비를 들인데 비해 국민의 축제로 승화되지 못했다는 비판도 없지
않았다. 더욱이 현란한 수사로 치장된 상징들이 지나치게 추상적인데다
행위가 위주로 이루어져 단지 하룻밤 축제로 끝나 아쉬움이 컸고 세기의
전환을 체험하려는 시민들의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이다.
문화관광부는 2000년을 ‘새로운 예술의 해'로 정해 1월 22일 국립중앙극장에서
새로운 형태의 공연으로 개막제를 열었다. ‘인터렉티브 네트워크 아트Interactive
Network Arts'라는 다소 생소한 이 행사는 새로운 예술의 개념과 방향성의
일단을 제시했다는 긍정적인 평가와, 뭐가 뭔지 산만했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엇갈렸다. 일반은 물론 예술가들 조차도 ‘왜 새로운 예술인가'에
대한 개념과 방법론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한데 따른 반응이었다.
문화관광부가 정의한 ‘새로운 예술'이란 기존 장르내에서 실험적이며
독창적인 표현행위를 의미한다. 동시에 장르간의 통합과 장르내의 분화
등에 의한 새로운 형태의 예술, 환경친화적 예술 등을 포함한 열린 개념이다.
다시 말해 표현수단이나 양식이 새로운 것, 테마나 소재가 새로운 것,
전통적 예술의 영역을 현대적으로 확장시킨 것 등을 전반적으로 조망해보고
비전을 제시하는 작업이라는 것이다.
디지털기술에
의한 정보통신혁명
면면히
흐르는 시간 속에서 어느 한 부분을 기점으로 ‘새로운 예술New Arts'이라고
정의하기란 매우 어렵다. 어느 시대나 늘 ‘새로운 것'은 있었고, 그것은
더 새로운 것에 밀리는 순환을 해왔기 때문이다. 새천년이 열린 2000년이라고
해서 예술의 내용이나 형식이 하루아침에 새로워야 한다는 것은 억지라는
주장에도 일리는 있다. 하지만 21세기를 맞아 인간을 에워싼 환경은
급변하고 있다. 그 첫째가 디지털기술에 의한 정보통신혁명이다. 20세기
아날로그 사고나 기술이 디지털로 바뀌면서 첨단 테크놀로지와 인터넷이
인간의 환경과 의식까지 뒤흔들고 있다. 이런 전면적인 변화의 물결
속에서 예술도 뭔가 새로워지지 않으면 존재가치를 잃게될 위기에 처해있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사회가 필요로 하기 때문이다. 20세기는 인가사회가 원하는
것이라는 이름아래 지배문화로 충족되어 왔지만, 새로운 밀레니엄을
맞아 예술은 인간의 생존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역할을 수행해야 한다.
다시 말해 21세기 예술은 소통적이며 참여적인 변신을 필요로 한다.
이에 맞는 새로운 형식을 찾아내는 것이 뉴아트의 우선적인 목표라고
할 수 있다. 이미 환경미술, 페미니즘, 신체에 대한 관심이 고조된 상태다.
다양성의 추구와 전문화도 새로운 예술의 특성으로 부각되고 있다. 전통과
현대, 클래식과 대중문화, 한국적인 것과 서구적인 것이 서로 섞이고
상호의 영역을 넘나드는 현상이 가속화되고 있음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다.
과거에는 예술로 인정되지 않았던 분야들이 예술로 편입되는 등 그 지평을
확대시키는 것 또한 ‘새로운 예술'의 역할이다.
그러자면 예술이나 예술가도 새로운 환경, 새로운 기술에 대한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 첨단 테크놀로지와 미디어에 대한 이해나 탐구 없이는
새로운 예술환경에 적응할 수가 없다. 컴퓨터, 인터넷, 웹은 기본이고
영상·조명·음향의 특성을 찾아내 예술과 일상의 공유를 시도하는 작업
또한 ‘예술가의 몫'이 아닐 수 없다.
‘새로운 예술'은 형식과 내용에서도 파격적인 변화를 시도한다. 장르간
통합 또는 탈장르화는 기본이고, 전통적 영역의 번안 또는 재창조도
유행처럼 번지는 추세다. 여기서의 키워드는 ‘트랜스 컬추럴trans-cultural,
즉 ‘종합문화'다. 트렌스 컬추럴은 퓨전의 속성을 가지면서도 더 포괄적이다.
미술, 연극, 영화를 따로 따로 보기 보다는 한곳에서 한번에 누리고
싶어하는 현대인의 욕구를 반영한 예술양식이 아닐 수 없다.
뭔가 새롭다는 것은 주제와 접근방식, 표현방법이 새로움을 뜻한다.
따라서 하드웨어나 소프트웨어에 대한 관심 못지않게 콘텐츠웨어에 대한
관심증대가 또한 관건이다. 예술은 이제 감상자가 아니라 예술의 중심에
서게된다. 공공성, 참여, 개입, 비평이라는 다양한 형태로 삶과 예술의
소통을 유발하는 일상의 동반자로 자리매김하는 것이다. 결국 아무리
‘새로운 예술'이라 해도 그것이 인간사회가 필요로 하는 것인가, 다시
말해 인간중심이 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 궁극의 목표다.
이같은 취지아래 새로운 예술의 해 추진위원회는 6개 장르로 나눠 행사를
벌여왔다. 예술장르간 통합과 융합을 내세우며 장르부터 가르고 예산을
배정한 것은 필요에 의한 것이라 해도 취지에 어긋날 뿐더러 나눠먹기
식이라는 오해를 받을 소지가 없지않다. 사업 내용 또한 새로운 예술의
개념에 맞게 구성하고 추진하는 데는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
행사는 문학, 음악, 연극, 미술, 무용 영상분야로 나눠 펼쳐졌으며,
춘추로 나눠 총괄사업을 마련했다. 총괄사업의 하나로 ‘평화와 생명의
땅, DMZ' 행사를 파주 오두산 통일전망대와 광화문 전광판에서 가졌다.
DMZ가 평화의 공간, 생명의 장소로 보존되어야 한다는 취지로 환경조형물을
설치하고, 음악과 춤이 어우러지는 문화마당으로 꾸몄다. 역시 총괄사업인
‘새천년의 풍경-월인천강지곡'의 주제음악을 담은 콤팩트디스크로 발매했다.
미술분야가 주최하는 축제는 8월 ‘양평 프로젝트'를 시작으로 ‘탄광촌
미술관' ‘마인사이트 머니사이트' ‘유틸리티 폴더' 등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페미니스트그룹 입김이 서울 종묘에서 펼치려던 ‘아방궁 점거
프로젝트'는 유림들의 반대에 부딪쳐 곡절을 겪기도 했다. 주최측은
“가부장적 유교문화의 상징인 종묘앞 시민공원을 자궁으로 재구성해
여성해방 특구로 꾸미겠다"는 계획이었으나 유림측은 “국가의
사당인 종묘에서 그런 행사를 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는 강경한
입장이었다. 전통적인 가치와 현대적 발상이 충돌한 그같은 헤프닝이
‘새로운 예술'의 단면을 상징했는지도 모른다.
결론적으로 문화관광부가 제정한 ‘새로운 해'는 한국 문화예술계, 특히
젊은 창작인들에게 자극을 주고 실험의욕을 북돋은 측면에서는 긍정적인
기여를 했다고 본다. 그러나 너무 잘게 쪼개 행사는 많았으나 특별히
주목받은 작품이 많지 않았다는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또 전체를
조망하는 종합평가가 매우 어렵다는 점도 문제로 남는다. 무엇이 새로웠으며
어떻게 새로웠으며 왜 새로웠는지를 평가 분석한 백서가 만들어져야
할 당위가 여기에 있다.
‘새로운 예술의 해'의 기대되는 성과물 중 하나가 ‘새로운 예술모색
워크샵' 보고서다. 문화비전 2000위원회가 주관하여 매월 1회씩 서울을
비롯해 통영 광주, 춘천, 안동, 충주, 강릉, 제주, 전주, 대전 등을
돌며 중앙의 예술인과 학자, 지역문화인들이 함께 참여하여 벌인 워크샵의
주제발표문을 한데 묶어낸 예술의 해 추진위원회의 다양한 아트페스티벌과
문화비전 2000위원회의 새로운 예술모색 워크샵이 병행됐다는 점만으로도
예년과 다른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할만 하다.
대중문화
3차개방
정부가
지난 6월 일본 대중문화 3차개방을 한 것도 빼놓을 수 없다. 이에 따라
2000석 이하 실내장소까지 허용되었던 일본 대중가요 공연이 실내외
구분없이 전면적으로 가능해졌다. 영화도 3차 개방으로 ‘18세 관람불가'를
제외한 영화의 국내 상영이 허용됐다. 극장용 애니메이션도 국제영화제
수상작에 관해 국내 상영이 허용됐고, 2차에서 제외했던 음반, 게임
방송부문도 제한적으로 개방해 사실상 모두 문을 연 것이나 다름없다.
귀추가 주목된 분야는 애니메이션이었다. 수입가능한 국제영화제 수상작은
20여편 정도인데 국내 흥행여부는 계속 지켜보아야 할 것 같다.
3차에 걸친 일본 대중문화 개방의 가장 큰 성과로는 일본과 일본문화에
대한 콤플렉스의 일단을 극복했다는 점을 꼽을 수 있다. 빗장을 연 결과
일본문화도 외국문화의 하나라는 인식이 확산된 것이다. 또한 영화나
일본 대중가수 공연에서 우리 관객들이 비교적 차분한 반응을 보였다는
점도 특기할 만하다.
문화종속 운운하던 기우를 넘어서 우리문화의 일본 보급 기회가 늘었다는
점도 큰 수확이다. 우리 영화가 일본에서 전에 없던 성공을 거두고 가수들이
진출하여 발판을 굳힌 것은 적어도 일본 대중문화 개방에 따라 양국간에
서로의 문화에 대한 관심이 증대된 결과라고 볼수 있다. 강제규 감독의
영화 좥쉬리좦가 일본에서 120만명의 관객을 동원하고 그룹 SES가 활동기반을
넓힌 것은 긍정적 성과라고 평가할 만 하다. 우리보다 6~10배에 달하는
일본의 대중문화시장에 한국문화와 문화상품이 진출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은 실보다 득이 컸다는 것을 의미한다. 다시 말해 한국영화나 TV프로그램이
아시아권으로 시장을 넓힐 수 있는 전진기지를 마련한 셈이다. 우리보다
기술이나 마케팅이 앞선 일본의 애니메이션을 통해 선진기술을 배우고
창의력을 자극받는 계기가 된 점도 개방효과의 하나다. 우리 젊은 이들의
두뇌나 감각은 이런 기술과 노하우를 소화하여 보다 창의적인 응용을
할 수 있는만큼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에게 이득이 아닐 수 없다.
앞으로의 과제는 좥쉬리좦처럼 거대한 일본시장을 파고드는 경쟁력있는
상품을 만들고 일본의 마케팅 전략을 활용해 미주나 유럽시장으로 진출하는
것이다. 또한 일본문화 베끼기라는 고질적 병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인식의 확산이 필요하다. 일본 대중문화 개방을 계기로 우리문화의 독창성을
찾고 개성있는 양질의 상품을 만들어 내는 노력이 중요하다. 그동안
음성적으로 유통되던 일본문화가 양성화된 만큼 경쟁하는 도리밖에 없다.
문제는 자신감이며 창의력이다. 일본 대중문화를 너무 가볍게 보지도,
너무 두려워 하지도 말고 외국문화의 하나로 수용하면 되는 것이다.
빗장을 푼 이상 전면개방은 불가피하고 시기도 시간문제라고 본다. 일부에서는
한국과 일본이 월드컵을 공동개최하는 2002년을 완전개방의 적기로 보는
시각도 있다. 그러나 낙관론은 금물이다. 일본의 거대한 자본시장 침투나
감각적 흥미만을 앞세운 저급한 대중문화의 유입을 경계하지 않으면
이상 과열현상이나 문화시장 잠식현상이 나타날 수도 있기 때문이다.
2000년 한국 문화예술 결산에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이슈는 남북간
문화교류에 물꼬를 텄다는 점이다. 교류란 오고 가는 것이라고 할 때
아직은 북한 예술단이 남한에서 공연을 가진 단계이나 남북관계 진전에
따라서는 상호교류의 가능성은 보여준 셈이다. 문화관광부가 만든 2월의
‘세계평화미술대전'에서의 북한 미술품 전시를 비롯, 6월 평양교예단의
서울공연, 8월의 조선국립교향악단 공연 등 굵직한 행사들도 적지않았다.
이밖에 북한영화 좥홍길동좦이 SBS TV에 방영되고 KBS가 백두산과 한라산을
잇는 다원방송을 하는 등 북한취재 및 프로그램 소개도 햇볕정책과 화해무드를
타고 활기를 띠었다. 학계 영화계 미술계 인사들의 북한 초청방문도
잇달아 교류방안이 토의됐다는 것도 고무적인 현상이다. 또한 광화문포럼과
연극협회등에서 남북문화예술 교류를 주제로한 포럼과 심포지엄을 가진
것도 변화의 한 단면이다. 그러나 남북의 진정한 문화교류가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인내가 필요하며 해결해야 할 과제가 산적해있음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공연히 들떠 설치다가 낭패를 본 사례가 없지 않으며, 체제에
따른 이질감의 장벽이 너무 두터워 이를 해소할 방안이 간단치 않기
때문이다. 국회 국감에서도 현재의 남북한 문화교류는 교류가 아니라
북한것만 일방적으로 남한에 들어오는 일방통행식이라는 지적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는 민족 동질성 회복에 무슨 도움이 되겠느냐는 것이다.
야당의원들은 평양교예단과 조선국립교향악단 공연을 예로 들면서 초청단체간
경쟁으로 공연료가 천정부지로 뛰어올랐음을 예로 들어 햇볕정책의 결실을
과시하기 위해 무리하게 추진한 탓이라고 비판한 점도 참고할 필요가
있다. 언론들도 백만달러 웃돈을 주고도 북한측의 일방적 요구로 쫓겨난
남북음악제는 국제적 망신이라고 비판했다.
통일에 대비해 남북의 문화적 이질감 해소를 위해 교류는 필수적이다.
하지만 웃돈을 얹어준다거나 과도한 경비를 들여서까지 일방적 교류를
할 필요도 없으며 해서도 안된다. 예술성보다 사상을 강조하는 북한의
예술보다는 언어문제등 실질적인 분야부터 머리를 맞대고 논의하고,
동등한 조건에서의 합작등을 검토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본다.
한 해를 돌아보며 가장 활발했던 장르는 영화가 아닌가 생각된다. 남북
화해무드에 걸맞는 소재인 박찬욱 감독의 좥공동경비구역JSA좦가 좥쉬리좦
못지않은 돌풍을 일으켰다. 과거의 반공 극과는 달리 재미와 완성도에
역점을 둔것이 빅히트의 비결일지도 모른다. 그밖에도 좥단적비연수좦
좥리베라메좦 좥비천무좦 등이 관객들을 모았고 좥오 수정좦 등 작품성을
평가받은 영화도 많아 영화전반이 풍성했다. 한해를 결산하는 청룡영화제도
이런 풍요에 힘입어 경쟁이 치열할 수 밖에 없었다. 아셈 등 국제행사에
힘입어 클래식 음악계도 빅이벤트가 많았고, 가요쪽에서도 조성모의
인기와 서태지의 컴백쇼 등이 화제를 만들었으나 TV연예 오락의 저급한
언어와 내용은 여전히 개선은 커녕 정도가 심해간다는 비판을 면치 못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것은 역시 국민들이 아니었을까. 정쟁의 연속과
제고의 경제위기에 나라가 흔들리고 구조조정에 따른 실업과 혼란속에서
문화의 향수는 뒷전이고 고작해야 TV에 매달리는 형편이었으니 말이다.
21세기는 문화복지도 실현됐으면 하는 바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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